조회 수 35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주기도문6 (마6:9-13)

 

지난 주에 일용한 양식을 위한 기도에 대한 나누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은혜와 특별은혜가 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밥’만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신자들은 ‘밥’으로 상징되는 ‘일반은혜’뿐만 아니라 ‘죄 용서’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특별은혜가 필요하다. 특별은혜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로서 자신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은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죄 용서’다.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킨다면 죄 용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의 신생아실에 가서 갓난아이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손을 씻어야만 한다. 병균을 옮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소득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 옵고’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다. 중국 사람이 한국에 귀화하면 한국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신분과 소속이 바뀐다. 즉 사탄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어진다. 우 리가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안에는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있다. 마치 깨끗한 옷을 입는 몸이 깨끗하지 않을 수 있도 있다. 귀화한 중국인은 신분이 중국인이지만 말과 행동과 습관은 여전이 중국인처럼 가지고 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신분은 분명히 의인이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죄인일 때가 많다.

 

왜 구원 받은 우리가 여전히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까? 첫째,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말은 죄책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이다.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즉 죄책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다. 둘째, 죄의 종이 된다. 누구든지 죄를 짓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종이 중인 시키는 대로 행동하듯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이 되었다. 셋째, 죄를 짓게 되면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죄로 오염된다.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 인간은 하나님을 잘 아는 지성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감정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죄가 우리의 전인격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럼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첫째, 신자는 죄책을 면제받고 영원한 죽음인 불못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둘째, 신자는 죄의 종에서 법적으로 해방된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셋째, 죄의 종애서 해방이 되었지만 지정의에서 여전히 오염된 상태는 남아 있습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받기도 한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라도 현실적으로 죄를 지을 수 가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사는 동안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늘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죄로 오염된 상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가 없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와 고백이 필요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생생한 사랑과 친교를 누리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만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속에 회개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하러 모였을 때, 지난 한주일의 죄악을 토설하고 회개한 만큼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반대로 별로 회개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고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은 굳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한 순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회개는 천국 문에 들어갈 때까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날마다 하나님께‘용서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형제를 용서하는 것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겠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 처럼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22:39) 사랑의 표현은 용서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가 어떻게 나를 피해해 주는 사람을 용서할까? 마태복음18장23-35절에 이런 비유가 있다. 왕은 종의 만 달란트(他连得)의 빚을 탕감했으나 그 종은 남의 백 데나리온(得拿利)의 빚을 갚아달라고 한다. 한 데나리온- 농동자 하루 일해서 받는 하루의 품삯. 백 데나리온- 백일 간 일한 돈. 한 달란트- 일 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일만 달란트-만년을 일해야 벌수 있는 돈이다. 일만 달란트는 자자손손 대대로 일해도 갚지 못할 어머어머한 빚이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인이어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를 용서를 하셨다. 이것이 은혜다. 그 은혜로 우리를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용서해 줄 수 있다. 손양원목사예(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교화시켜 양아들로 삼으신 고귀한 분이다.) 진정한 용서는 다시는 그 친구의 잘 못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용서의 목적은 관계회복이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를 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속에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때에 그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이 된다. 우리 유학생예배부도 하나님께 먼저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는 공동체가 되어, 서로 용서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 날마다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