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14 18:32

상처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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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한 묵상

 

내가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를 상처 주었다는 뜻이다.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이 상처를 잘 받는 법이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또한 상처를 잘 주는 법이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자신이 준 상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받은 상처만 크게 기억한다.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는 것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또한 상처를 받는 것은 내가 상처를 받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길가는 행인이 내게 욕설을 퍼부어도 상처받지 않는 이유는 내가 상처 받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은 내가 어떤 상처든 받기로 내가 먼저 마음의 빗장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거울이 없인 자신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결코 알 수 없듯이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나와 똑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을 '거울'로 보내주신다. 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자꾸만 화가 난다. 그리고 자꾸만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그 사람이 싫어서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갈지라도 그곳에서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자이므로. 그 사자를 통해 참 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잘 주고, 잘 주는 사람이 잘 받는데, 그런 사람의 특징은 첫째, 말을 쉽게 한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람을 신뢰하길 잘한다. 셋째, 사람을 대할 때 의존적이다. 넷째, 사람을 대할 때 나름대로의 기대감을 설정하고 접근한다. 다섯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쉽게 돌아서며 분노하며 원수처럼 여긴다. 여섯째, 사람을 쉽게 자랑한다. 일곱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는 것을 쉽게 여긴다. 여덟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아홉째, 쉽게 화를 낸다. 열째, 감정의 기복이 있어 기분파란 말을 종종 듣는다. 요컨대 속사람이 갓난아이다.

 

어느 젊은 목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자기 아이가 예배시간에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그냥 내버려두는데 그 이유는 예배시간에 엄하게 하면 그 아이가 나중에 예배에 대한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서란다. 목사일지라도 자기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보다 아이가 상처받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무엘상의 엘리제사장이 자기 아들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한다는 말씀처럼. 결국 그 아들들은 훗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때 자신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했을까? 아니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징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했을까? 무엇이 진정한 상처인가?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사람들에게 과연 상처를 받으셨을까? 어떻게 상처를 대처하셨을까?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25)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5:44)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7:18) 예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과 임재만을 구하셨다(8:29) 예수님은 상처받으실 공간이 그 속에 전혀 없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셨고,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셨던 분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셨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을 찾아오는 현지인 목회자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인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조만간 버리고 도망갈 그들조차 사랑하셨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예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은 쉽게 상처 받는 내 속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숙한 아이인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구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상처와 고통은 구별되어야 한다. 상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진 것이라면 고통은 말 그대로 좋지 않은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순 있어도 고통 없이 살 순 없다.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면서 산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온전히 구한다면 결코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통 받으면서 살 수 있다. 고통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첫째는 absence이고 둘째는 bad thing이다.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거나(전자),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받았다면(후자) 이것은 고통이다. 모든 상처는 회개로 치유되고, 모든 고통은 구속의 은혜로 치유된다.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반드시 있다. 이 고통을 통해서만 그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두 가지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위로로 견디게 하시고 고통 중에서도 감사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 경험한 위로로 인해 똑같이 고통당하는 다른 이들에게 위로의 통로로 쓰임 받게 하시는 분이시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absence+bad thing)을 보면 하나님이 장차 나를 통해 하실 일을 예견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 대로 wounded healer로 쓰임 받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백인들은 흑인지역에 아무런 권위도 영향력도 없는데 그 이유는 흑인들이 고통당할 때 그들은 침묵했고, 흑인들의 고통을 이용해서 그들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선교사들은 환영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처럼 억압을 경험했고 또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참된 권위와 섬김의 영향력, 그 영향력의 크기와 깊이는 내가 경험한 고통의 크기와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지도자가 경험한, 그리고 경험하는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흘린 눈물이 없으니 어찌 고통당하는 이들을 기뻐하게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지금 내가 겪은 혹은 지금 받는 상처(혹 고통)로 인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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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락 선교사님의 소식을 전하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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