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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 김광락선교사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는 헬라세계에서 신을 대적하는 인간의 무모한 행동을 묘사할 때 쓰던 표현이다. "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goads." goad란 단어는 가축을 인도할 때 쓰는 막대기이다. 각자의 삶속에 저마다 goad가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울의 경우는 복음에 대한 무지와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goad를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나의 goad는 무엇인가? 나는 goad에 순응하는가 아니면 반항하면서 살아가는가?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훗날 바울은 goad를 대적하던 자신의 과거를 통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설명할 수 있었다. 불순종의 원인은 바로 무지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참 지식의 본질인데 이에 대한 무지는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쉽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삶속에 여러가지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알고 붙잡는 일이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2)." 살아가면서 나름 잘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한 것이 훗날 큰 후회로 남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하지 않고 자신의 수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분별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인데,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겠지'라는 생각이다.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올바른 사고방식, 은혜주의적 사고방식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은혜로 대접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해야 마땅하지'라는 생각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의 본질을 다룬 뒤 본격적으로 그것을 삶속에 적용하려고 하면서 가장 먼저 분별의 문제를 다룬다(12:2).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How do I know the will of God in time of this? 첫째, 복음의 본질인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서 출발할 것(1). 둘째, 내 삶 전부를 제물로 드리는 예배의 회복(1). 셋째,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버릴 것(2). 넷째,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수'를 기억할 것(3). 다섯째, 이기주의를 버리고 지체의식을 가질 것(5).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대충 대강 짐작하며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확신하기 위해 거듭 확인하는 것은 결코 불신앙이 아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무대포, 얼렁뚱땅, 지레짐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우리는 거듭 재삼 재사 test해야하고 approve 해야 한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잘 분별했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참된 열매로써 알 수 있는데, 첫째, 올바른 분별은 선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아는 것이다. 둘째, 참 분별은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참 분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참여하는 놀라운 경험이다.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his pleasure, and his perfection(12:2).

 

어느 날 밤 바다를 항해하는 군함이 있었다. 그 군함을 지휘하는 함장은 그 군함이 가려는 항로에 작은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즉시 확성기로 피할 것을 외쳤다. 그런데 그 작은 불빛에서 도리어 그 군함더러 피하라고 외쳤다. 함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 언쟁을 벌이던 중 레이더를 보고 있던 일병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함장님, 저건 등대입니다." 함장은 그제야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치고 급히 항로를 바꿀 것을 지시했다.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만을 버리고 등대의 지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감정을 버리지 않으면, 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큰 암초에 부딪쳐서 좌초하게 될 것이다.

 

얼마전 어떤 분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가졌었다. 그분은 자신이 중요한 선택과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작정기도를 하고 있는 중인데 자신의 안테나가 고장이 났는지 도무지 응답이 없다고 하셨다. 구체적으로 어떤 결정을 놓고 고민하는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그분에게 하나님처럼 굴어서는 안되는 것이니까. 나의 시각에서는 쉬운 것인데 본인의 입장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아 고민이 많다. 바둑이나 축구나 똑 같은데 해설자의 시각에서는 답이 보이는데 선수의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분별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나는 웃으며 "안테나 수리하면 들릴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분별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한번쯤 자신의 문제에서 빠져나와서 산책을 하면서 제3자의 시각에서, 선수가 아닌 해설자의 시각에서, 먼 발치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문제에 파묻힌 가운데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어떤 문제를 놓고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기도를 하지 말고 생각을 할 때이다. 내 생각과 가치기준과 관점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찾아봐야 할 때이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에 일치하는지 점검하고 확인하고 증명할 때이다. 내 자신을 하나님 보시는 대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요청할 때이다. 기도해도 안 된다면 기도할 때가 아니라 생각할 때이다. 내 생각을 생각할 때인 것이다.

 

열심히 단추를 꿰었는데 결국 맞지 않아 옷맵시가 틀어져버렸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동안 열심히 꿰었던 단추를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의외로 복잡하게 꼬인 많은 문제들을 간단하게 푸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첫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점검만 해도 의외로 간단하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만 해도 거의 모든 문제들이 풀린다. 문제가 생겼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그리고 어디서 꼬이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보자.

 

청년들일수록 선택과 결정에 앞서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다. 3들은 대학선택, 과선택, 전공선택 등 고민이 많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선택, 배우자 선택으로 고민한다. 대학전공만 놓고 보자. 4,5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대학 때 배운 전공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실제로 대학전공과 자신의 삶이 거의 상관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을 가지고 얼마나 고민을 하며 방황했는지 자신의 대학생활을 후회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가이지,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 선택을 존중하시기 때문에 나더러 이렇게 저렇게 선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임감 있게 선택하고 결정하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선택과 결정을 구속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배우자 선택으로 고민하는 청년들이 많다. 자신의 결혼 상대를 그리며 기도하는 청년들도 많다. 희망 배우자에 대한 기도제목을 갖고 있는 청년도 많다. 또 아무개랑 결혼할 것인지 기도하는 청년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시어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선택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많은 청년들이 만나기도 전에 알지도 못하는 '가상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데 이는 스스로 결정과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것이다. 나는 '가상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당장 그만 두라고 권하고 싶다. 대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지, 나는 한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지, 나는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능력이 있는지, 혹은 교회처럼 순종할 준비가 되었는지.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분별을 위한 기도라고 믿는다.

 

어떤 분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불러주시지 않는다고 고민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분은 남편과 자녀를 둔 분인데 선교사역에 대한 로망을 갖고 계셨다. 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해드렸다. 첫째, 언어가 준비되었는가. 둘째, 가족이 소명감으로 하나 되었는가. 셋째, 남편이 주도적으로 행하는가. 넷째, 선교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은사와 사역이 분명한가. 다섯 째, 파송교회와 기관이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그것을 거듭 (온 가족이 함께) 확인하고 선교지에 나오기까지 최소한 3,4년이 걸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나중에 답장이 왔다. 본인이 선교지를 생각한 것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도피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지금 그 부르심에 제대로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는 편지를 받고 주님께 감사드렸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지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부터 요나서를 묵상하게 되는데 요나서만큼 분별의 문제를 잘 다루는 책은 없을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서도 다시스로 도망갔다. 도망가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났는데도 그는 돌아갈 생각보다 바다에 빠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삶속에 큰 풍랑을 경험하면서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분별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인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회피하며 도망다닌 이유는 니느웨를 향한 그 자신의 감정 때문이었다. 요나는 니느웨를 싫어했고 미워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분별력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나 그 어느 누구가 결코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감정'인 것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분별을 방해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감정'임을 잊지 말자. 분노, 미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편견에 의한 증오, 등등. 올바른 분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분별을 위해 때론 산책도 하고, 전혀 다른 분야의 책도 읽고, 전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한 이유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거짓말과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도 가르쳐주신다. 요한일서 전체가 분별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고 하시면서 분별법을 가르쳐주셨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분별법은 쉬우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상품(goods)과 열매(fruits)의 차이와 같다. 거짓 영을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진데, '성격(personality)''성품(character)'의 차이를 알고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성격)에 속지 말고 숨어 있는 것(성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전 2:15)." 많은 사람이 분별과 비판을 혼동하고 있다. 사람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거나 혹은 가치를 논하거나 평가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월권이다.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우를 범하기 쉬운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별(discernment)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것으로 남을 비판함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인 것이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27:19)." 거울을 보기 전엔 자기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주신다. 이것이 소위 '관계싸움' 혹은 '관계훈련'이라고 하는 것인데, 내가 갈등을 빚는 어떤 사람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내가 진정 어떤 모양의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내 모습을 발견하기보다 계속 그 사람이 변하기를, 그 상대방이 안고 있는 문제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관계싸움에서 이길 수 없고, 관계훈련에서 패스할 수 없다. 계속해서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나며 고통을 당한다면 관계훈련이란 과목에서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그가 변하기를 기도한다면 학점이수는 불가능하다. 그를 '내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요 교사'로 여기지 않는 한 관계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남아공은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다. 내가 볼 때는 진짜 다이아몬드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나 다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전문 감정사는 쉽게 분간해낸다. 분별은 배워야 하는 것이고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를 가까이서 자주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진짜를 알면 알수록 가짜를 아는 것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적그리스도는 쉽게 분별할 것이고, 진리의 영을 알수록 거짓 영을 분간하는 것은 쉬워질 것이다. 가짜를 분별해내려면 진짜를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고 분별이 연습이 되면 될수록 마치 땅 위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오늘 이곳에서 공부하는 몇몇 20대 청년들과 얘기하면서 '가상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조언했더니 다들 눈이 둥그래졌다. 가상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배우자를 향한 자신의 분별력과 판단력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가상배우자를 위해 기도한 사람보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었던 청년들이 훨씬 더 멋진 결혼을 하며 멋진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20여년 청년들을 섬길 때 그들이 서로 사귀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게 이러이러한 배우자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말고, 대신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늑대가 양떼가 살고 있는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엄마다. 문열어줄래"라고 했다. 양들은 믿을 수 없으니 발을 보여달라고 했다. 늑대는 발에 밀가루를 묻히고 내밀었다. 그것을 보고 안심하여 문을 열었는데 늑대가 집안의 양떼를 다 잡아 먹었다. 우리 아이들이 잘 아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에 큰 문제가 있다. 양들은 시력이 매우 약하고 청각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변장을 해도 목소리를 변조해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무리 몸이 변형되었어도 마리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랍오니여"라고 반응했다.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분별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와 같은 것이다. 내 안에 참 사랑이 있으면 분별은 식은 죽먹기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안다면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특별한 훈련이 없이도 가능한 것이다.

 

어떤 분이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점포를 물색하셨는데 두 점포를 놓고 고민에 빠지셨다. 한 곳은 목이 좋은 반면 작았고, 다른 한 곳은 컸지만 임대료가 비쌌다. 사업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좋아보였다. 둘 다 장단점이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만 했다. 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집에 가서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종이를 꺼내서 각각의 장단점을 다 써보라고, 그리고 본인이 사업하려는 아이템도, 구체적인 수입과 지출에 대한 예산, 중장기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적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도해보라고 했다. 듣는 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그분이 가장 합리적으로 결정하셨으리라 믿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고민한다면 이렇게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능한 구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 적어놓고 비교하고 "바라보면서" 함께 기도해보라고. 결국 선택과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식의 기도는 결코 응답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교회의 찬양대에서 사람이 필요한데 꼭 와서 도와달라고 할 수 있다. 도움을 요청할 때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때로는 거절하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자신의 소명과 은사와 맞지 않을 때이다. 또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했을 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주는 도움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의존하게 만든다면 나의 도움은 결국 그의 성장을 막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변의 필요와 요청이 내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 살다보면 결국 내 자신이 없어져버리고 내 삶은 공허해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경우는 요청을 거절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일 수 있다.

 

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니?"라고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어 가고 싶다고 하면서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가요?"라고 한 아이가 말했다. 내가 그 말에 얼마나 꾸짖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할 지 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돈과 상의하고 결정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과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적으론 자신의 지갑과 상의를 한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지갑에게 묻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돈을 상전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 돈 문제가 내 분별력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돈을 섬기는지는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께 묻는지 아니면 지갑에게 묻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은 돈에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많은 사람들이 선택과 결정에 앞서 고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지doing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being이다. 우리의 맏형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christ-like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다(8:29). 택시를 탈 것인가 버스를 탈 것인가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경영학을 전공할 것인가 경제학을 전공할 것인가 염려하면서 세월 허송하기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양으로 가꾸어나갈 것인지 염려하는 것이 훨씬 거룩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 여러 가지 분별의 영역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생각을 분별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유형(frame of thought)을 알아내고 그것을 바꿀 줄 아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다. 내 생각이 바뀌면 내 감정이 바뀌고, 내 감정이 바뀌면 내 태도가 바뀌고, 내 태도가 바뀌면 내 습관이 바뀔 것이고, 결국 내 삶 전부가 변화될 것이다. 순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기 행동을 바꿀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극히 일시적인 변화이지 참된 변화가 될 수 없다. 성경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적용인데 참된 적용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참된 분별은 내 생각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볼 줄 아는 것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6,27)." 감정을 이해하면 분별에 도움이 된다. 감정이란 emotion, e + motion, 혹은 energy + motion으로서, 행동하게 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분노의 감정 자체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을 잘 다스려서 올바른 행동으로 귀결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은 분노와 미움 같은 감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 억누르려고 애쓴다. 그 결과 감정 자체가 죽어버려서(drain out) 삶에 아무런 의욕이 없는 상태가 돼버리기도 한다. 감정은 어떤 모양이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에너지로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다윗의 시편, 특히 저주시를 보면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데 사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미움 혹은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흘려보낼 것인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51:17)." 분별하는데 감정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준비과정이다. 특히 쓰라린 감정, 부정적인 감정, 상한 감정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감정을 처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참 분별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란 생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속는 거짓말이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아이를 키울 때 상한 음식을 토해낼 때 등을 두드리면서 잘한다고 하지 결코 꾸짖으면서 참고 견디라고 말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쓰라린 감정,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는 것을 원하시며 기다리신다. 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새로운 행동을 위한 새로운 에너지로 변환시켜주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 앞에 마음을 토할지어다." 가인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행동한 것도 문제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눌러버려서 감정을 죽이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이 말씀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의 긍정적인 초석을 이루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신 경우가 많다. 어찌해야 좋을지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냥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다. 기도해도 안 될 때는 기도를 그만두고 생각할 때이다. 자신의 길을 돌아볼 때이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내가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그렇게 남을 대접했는가, 내 행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면 기도를 내려놓고 내가 행동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내가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대접받는 열쇠가 된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율법''선지자'로 구분하셨다. 이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율법'은 토라 즉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선지자'12권의 역사서, 5권의 시가서, 17권의 예언서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선지자란 다름 아니라 토라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과거의 삶(12), 현재의 경험(5), 미래의 조망(17)하는 것이었다. , 예수님이 생각하신 '선지자'란 미래를 점치는 그런 무속인의 모습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는 해석하고 분별하는 이들이었다. , 분별이란 예언의 본질인 것이다.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의 뜻과 원칙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토라는 모든 분별의 견고한 토대인 것이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3)"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sky, but you cannot interpret the signs of the times. ""를 분별(해석)할 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time)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는 하나이지만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kairoskronos인데, 전자는 특별한 일이 발생하는 때이고, 후자는 흘러가는 때이다. 전자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고, 후자는 사람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지만 시한폭탄과 같이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는 카이로스의 때는 내가 알 수 없고 결정할 수도 없다. 내가 언제 태어나고 죽을 지, 내가 언제 웃을지 혹 울 것인지를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래서 분별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겸손히 가르쳐달라고 구해야 한다. 카이로스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

 

모세는 하나님께 카이로스의 때를 가르쳐달라고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군인은 제대할 때를 늘 계산하면서 산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 시련이 끝날 지, 언제 인생길을 마감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때(kairos)를 가르쳐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간절히 구하면 가르쳐주실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셨는데 내가 대학생 때 돌아가셨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은 외할머니께서 본인의 임종 시기를 알고 계셨고 또 준비하셨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외손주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임종하시기 전 주간을 온전히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셨다. 임종하시기 전날은 깨끗이 몸을 씻으시고 모든 밀린 작정헌금과 채무를 다 해결하셨다. 나는 외할머니처럼 때를 잘 분별할 줄 아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 Consider it pure joy, my brothers, whenever you face trials of many kinds.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분별이 절실한 때이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말씀이다. 시련에 담긴 하나님의 숨은 뜻을 발견할 때만이 우리는 모든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다. 대부분 시련에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시고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 참 분별력이다. 이것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으려 할 때 주어지는 은총인 것이다. 우리에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시련'이라는 불청객을 만날 때마다 "주님, 이것을 통해 제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온전하지 못한 부분, 준비되지 못한 부분,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자.

 

요나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분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회피하며 도망 다녔다. 결국 큰 풍랑을 만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큰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로 가기로 했다.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쳤지만 그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생명을 얻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니느웨가 회개하자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화를 내었다. "하나님,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럴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라고 하나님께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었다. 요나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요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박넝쿨을 가지고 요나에게 물으셨다. "이래도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요나 스토리이다. 몸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참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몸은 교회 안에서 충성 봉사하는데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과 논쟁 중인 그리스도인이 많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가시적인 열매를 보고 있음에도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께 분노하며, 분노하는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분별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분별은 평생이 걸리는 작업인지 모른다. 요셉은 그가 17세 되던 해 하나님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형들에게 버림받고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무고히 감옥에 갇히는 죄수의 신분이 되었다. 연속적으로 억울함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참고 견디며 성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40이 될 때 기근으로 인해 형들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에 응어리졌던 감정을 건드리셨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가르쳐주시려고 숨어있던 쓴뿌리를 드러내셨다.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가 온 것이다. 마침내 요셉이 자신의 쓰라린 감정을 내려놓고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미리 전령으로 보내어 구원을 예비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기부터, 그 뜻을 진정으로 깨닫고 이해하기까지 무려 23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나는 좀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좀 더 인내하며 믿음을 키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하여 기도하고 있다면 기간이 있음을, 큰 분별일수록 큰 인내가 필요함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