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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행복한 성도(Ⅰ) / 빌 3:7-14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도록 사랑할 사람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죽도록 사랑할 대상이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현실성도 별로 없지만 순수하고 지극한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그러한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니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동화 같은 사랑을 사람들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일에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그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에 소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이 고생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의 일의 소중함을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땀을 흘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러한 일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던지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다 이 땅의 삶에만 한정됩니다. 그 행복도 이 땅에서의 삶에 제한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서 행복감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영원한 행복을 내다보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로마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 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라"(행 26:29)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사람, 로마 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기쁨을 누리며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같은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을 알고, 맛보고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권면하는 사람 바울, 그가 행복한 사람인 것은 그가 많은 재물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좋은 집을 소유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 이유는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의 가치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 사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보다 더 나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 학부인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열심을 다해 사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발견했다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출신 가문을 자랑합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합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을 자랑합니다.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것을 따라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 허상들입니다. 행복의 조건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얻는다고 자동적으로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는 인생의 길을 찾은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 땅의 유한한 삶을 넘어 부활의 새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가치 있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나 실제로는 무가치할 뿐 아니라 더러운 똥과 같은 것임을 안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똥과 같이 무가치한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얻으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인생을 걸고 투자하고,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온갖 정력을 다 쏟아 붇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엇을 얻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의 욕심이 이 세상을 어떤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까? 배설물들로 가득 찬 것과 같은 추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기, 폭력, 비방, 착취, 살인 등.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마 13:44-46). 밭을 갈다가 귀중한 보물을 발견한 자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과 바꾸어도 지나치지 않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다른 모든 것들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 아멘 교회 가족들을 이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인생

 

이러한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바로 이것은 신앙 생활의 출발이자 기초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의 출발이자 기초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았다면 결코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사도.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음성 앞에 꼬꾸라진 그는 과거의 자신의 경력들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신앙의 삶을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바울처럼 드라마틱하게 예수를 믿게 되고 구원받은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그러한 극적인 체험은 없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 '잡힌 바'되었습니다. 그의 손에 붙잡혀 그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 하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연약한 결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 오셔서 여러분을 붙잡으신 결과입니다.

 

잡힌 바 된 그것으로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 말을 바꾸어 본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시고 자기의 것으로 삼으신 것을 이제 나의 것으로 끌어안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바울은 자신을 붙잡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좇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어 하신 말씀을 떠올릴 것입니다. 행 9:15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방 세계 선교의 목적을 위해 선택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본 서신에서는 이 세계 선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도로서 소명을 받았다는 것보다 우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본받는 것에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바울 사도의 경우는 사역적인 면에서 세계 선교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붙잡힌 바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힐 때 인간의 일을 벗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형을 속여 팟죽 한 그릇을 팔아 장자권을 얻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삼촌까지 속여 재물을 얻습니다. 장자권, 축복권, 아내, 재물을 얻었지만 야곱은 여전히 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런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께 붙잡혔을 때 그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일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야곱이 변해 이스라엘이 되고 이스라엘에게서 열두 지파가 나옵니다.

애굽 왕자 모세는 사십 세 때 인생의 최고 절정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와 혈기를 믿고 나갔을 때 아무런 일도 감당하지 못 하고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 모세가 80세에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붙잡혔을 때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 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을 감당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붙잡히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얍복강가의 사건, 미디안 광야의 사건이 있어야 하고 다메섹 도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에게 붙잡힌 바 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붙잡히는 것이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된 자유는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가치관에 붙잡힌 바 된 인생,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그러나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욕망에 붙잡힌 삶, 욕심의 종노릇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된 삶을 사십시오. 종종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나를 붙잡히면 내 인생 종칠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계획이 최선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시오.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제한되는 삶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어야 자유 하듯이, 기차가 철로 위를 달려야 안전하듯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될 때, 진정한 자유와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께 붙잡힌 바 되는 삶을 두려워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빠지지는 말자'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은혜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노닥노닥 거립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께 붙잡힌 바 된 인생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 인도하는 인생입니다. 제한된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는 인생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된다는 것을 우리편에서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어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인생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두 가지의 잔치가 벌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는  헤롯의 왕궁에서 벌어진 생일 잔치입니다. 다른 하나는 벳세다 광야에서의 잔치입니다. 여러분 잔치를 끝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오늘 행복했느냐?', '오늘 만족했느냐?'라고 물으면 어느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하겠는가?

일반적으로 잔치가 즐거우려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중심으로 두 잔치를 비교해 보십시다.

음식과 술 / 풍성한 음식과 술 -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음악과 춤 / 궁중의 전문 음악가들 -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

장소 / 화려한 궁중 - 황량한 빈들

조건을 따지면 벳세다 광야의 잔치보다 헤롯 왕궁의 잔치가 기쁨의 잔치여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헤롯의 왕궁의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이런 잔치에 오겠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오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벳세다의 잔치에 참여했던 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들은 분명히 예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가져오는 근본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행복할 조건들 - 좋은 집, 좋은 차, 경제적 여건 등이 없어도 부족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세상 살면서 그런 조건을 우리의 힘으로 갖추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건을 넘어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조건을 다 갖춘 자보다 더 고귀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종종 신앙의 기쁨을 모르는 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무슨 낙으로 사는가?' 우리는 잠시 죄악의 낙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인생, 주님에게 내 인생의 핸들을 맡긴 인생, 그래서 전능하신 주님이 책임지시는 인생, 무한하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인생이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된 인생을 사십니까?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에게 이 시간이 바로 그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된 인생을 사십니까? 다시 한번 우리를 붙잡으신 주님을 의지하고 그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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