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있는 소외 - 알바니아 이용범 선교사

by honey posted Apr 04, 2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선교사에게 있어서 소외감은 심각한 병중에 하나이다. 소외감은 선교지라는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성큼 찾아 와서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아픔이다. 선교지로 파송 받을 때의 환송과 기도들, 그리고 격려의 말들과 눈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 진 기억의 공간에 머물게 된 것 같다. “아직도 누가 우리를 기억할까?

 

몇 년 전에 공항에서 만났던 미국 선교사는 맹장 수술을 위해서 그리스로 가는 중이었다.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고통 중에 혼자여서 내가 도움을 주었다. 함께 버스로 비행기를 타러 가는 짧은 시간에 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를 파송한 교회는 아직도 너를 기억하고 있니?”
내가 새로 담임 목사님이 오셔서 새롭게 적응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기도를 약속하고 또 많은 위로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려...”
아마 그는 고통 중이었기에 더 심각하게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의 절규에 뭐라고 위로를 줄 수 없었다.

 

선교지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 친구들과 성도들이 선교사 주변에 생기면서 조금의 위로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제 이들이 우리의 친구들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생각해 보면 이들로부터도 우리는 이방인이며, 소외자 들이다. 이런 느낌은 가끔은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소외감의 극치에서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한 사모님의 기도가 기억난다.

 

나에게도 소외감의 현상은 꽤나 오래 된 질병이다. 이런 생각들을 할 때 종종은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잊은 것 같은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우울하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예기치 않았던 질병들이 찾아오게 될 때, 그런데도 누군가 전화도 없고 메일도 없을 때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소외감은 더 큰 소리를 지른다. 자녀들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가 없어서 마음 졸일 때, 이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서 걱정이 찾아 올 때 아무도 이런 일을 기억도 못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소외감은 더 크게 절규한다. 남자 선교사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오고, 사모들은 갱년기 현상으로 위축되는데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서 위로하지 않을 때 우리 내면의 소외감은 차곡차곡 그 두께를 더 하여 간다.

 

언젠가 길을 걸을 때 나에게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선교사의 삶이 외로우냐?”
“너는 지금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때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분이 나의 소외감을 지시고 더 큰 소외를 당하셨다. 어떤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한 소외가 아니라 그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버지로부터의 소외였다. 이런 소외는 바로 목적이 있는 소외가 아닐까? 만일 지금 우리가 겪는 소외도 어떤 목적으로 인한 소외라면 결국 그 분이 경험하신 그 소외와 맥이 닿아 있다. 이런 확신이 다가오면서 나의 내면에 다시금 잔잔한 감동이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간다.